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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정의를 위해 기꺼이 유배나 파직을 감수 했어요.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홍상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향촌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백성을 보호 하는데 힘을 쏟았어요. 그는 전란의 와중에도 유학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노력하였으며, 학문과 예절을 가르쳐 향촌 질서를 회복 하는데 큰 역할을 했어요. 또한 의병 활동을 통해 지방 민심을 다독이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 사회의 안정을 도모 했어요. 그의 행보는 단순한 유학자의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참여적 지식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돼요.
전쟁 이후 조정에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며 개혁과 인재 등용에 힘 썼어요. 그는 특히 기강 회복과 유교적 윤리 질서의 정립을 강조하였으며, 현실 정치 속에서도 도덕성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세를 견지 했어요. 그러나 광해군 집권기에는 인조반정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권신들의 전횡이 심화되면서, 홍상은 끝내 정치적 중심에서 멀어지고 지방으로 물러 났어요.
